[추천서적] 탁월한 사유의 시선
책을 반복해서 읽을 경우에는 보통의 두 가지 경우다. 첫번째는 다소 어려워서 다시 보기 위함이고 둘째는 너무 인상적이어서 다시 보고 싶은 경우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저자: 최진석)
은 내게는 후자의 해당되는 경우였다. 이 책은 철학에 대한 책이다. 그런데 고전이나 어려운 근대 철학을 풀이하는 책이 아니다. 한마디로 철학의 역할 내지 우리가 철학을 생각하는 일반적인 관념을 바꾸도록 하고 있다.
1. 철학은 무엇인가?
보통의 철학책을 보면 우리는 뛰어난 철학가의 이름과 그의 사상을 머리에 담으려고만 한다.
철학이란 철학자들의 남긴 내용을 숙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삶의 격을 철학적인 시선의 높이에서 결정하고 행위하는 것, 그 실천적 영역을 의미합니다. 문제를 철학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철학이지, 철학적으로 해결된 문제의 결과들을 답습하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든 철학은 시대를 반영한다고 한다. 시대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한다. 우리가 철학을 보고 배우는 것은 이론적인 지식이 아니라. 그 시대를 꿰뚫어본 그 시선을 배우라는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장자를 읽고 감동받았다면 장자처럼 사는 것을 꿈꾸지 말고, 장자가 사용했던 높이의 시선을 배우라고, 그 시선을 통해 지금 세상을 보라고..
그러면 그 높이의 시선은 무엇일까? 그것은 전략적인 안목이라고 한다.
철학적 차원에서 사유한다는 말을 다른 방식으로 비유하자면 전략적 차원에서 움직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층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들의 움직임에 종속적으로 반응하는 차원의 삶을 꾸릴 수 밖에 없습니다.
쉽지 않다. 지금보다 높은 시선을 갖는 다는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말처럼 쉬지 않은 일은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지식의 단편적인 습득을 넘어선 사유의 높이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쉽지 않다.
철학을 하는 목적은 철학적인 지식을 축적하는 일이 아니라, 직접 철학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책 내내 관통하는 말이다. 그동안 철학은 단순하게 인문적인 즉 학문적인 수준의 분야라고 여겼는데 저자의 글을 읽고 굉장히 현실적이고 냉철한 분야가 아닌가 싶었다. 저자가 주장하는 복수라는 부분은 정말 차원이 다르다.
복수는 극복이고 자기 회복의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복수의 결기가 없는 민족은 피해를 가한 상대를 저주하거나 증오하는 것으로만 세월을 보냅니다. 이러다 보면, 가해자의 장점을 배워서 일단 자신의 힘을 기르려는 노력이나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노력은 시작되지 못합니다.
반면에 살아 있는 민족은 저주나 원망에만 머무르지 않고 패배의 근원을 탐색하고 조용히 힘을 길러 최소한 다시는 이러한 이번 굴욕적인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자세에서라야 진정한 용서와 평화도 가능해집니다.
뒷골목의 천한 복수가 아닌 정말 복수가 무엇인지 그야말로 큰 시선으로 보여주고 있는 글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매번 일본의 반성없는 역사의식에 분노하지만, 정작 진정한 복수를 하고 있는지 되돌아야 봐야 한다.
일본을 증오하는 대신에 일본인들보다 더 자신의 일에 몰입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일본인들보다도 더 신용을 지켜야 합니다. 일본인들보다도 더 친절하고 예의를 지키며 공공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일본인들보다 더 책을 많이 읽고 더 깊은 탐구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일본보다 더 전략적이어야 합니다.
일본을 증오하는 데 쓰는 힘보다 휠씬 더 큰 힘을 일본을 배우고 극복하는데 써야 합니다. 일본을 무시하고 증오하기만 하다가는 다시 치욕을 당할 가능성이 커질 뿐입니다.
외국 사람들이 우스게 소리로 자주하는 말이 전세계가 일본을 높이 평가하는 데 한국만 우습게 본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 우습게 보는 것이 근거없는 자신감보다는 단순의 삐뚤어진 질시나 분노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예전에 어느 기사에 읽었는데 독도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을 보면 일본은 꽤 냉정하게 전략적으로 진행하는데 한국은 감정적으로 처리한다는 말을 본 기억이 난다. 쉽게 흥분하고 그만큼 쉽게 잊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그정도 시선의 높이밖에 없어서 그런 것일수도 있겠구나라고 이 책을 보면서 느꼈다.
자기가 처한 조건 속에서 일상의 잡다함이나 자질 구례함속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일상을 결정하고 지배할 더 높고 큰 단계에서의 결정을 감행할 수 있는 높이가 바로 철학적 시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역시 쉽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일상의 잡다함과 자질 구례함속에서 매일 매일 피로를 쌓지 않은가? 좀 더 현명해질 필요가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말 그게 중요한 것인지… 살면서 너무 자주 그것을 잊고 사는게 아닌가 싶다.
판 자체를 새롭게 벌이려는 시도, 그것이 철학이다.
그렇다. 철학은 죽은 학문이 아니다. 무서울 정도로 전략적인 학문이다. 과거가 아닌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 현재에게 주는 메시지인 것이다.
2. 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선진국은 선진국을 유지할 시선의 높이에 운영되고, 후진국은 후진국적 시선의 높이에서 운영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시선의 높이가 생각의 높이이고, 생각의 높이가 삶의 높이가 바로 사회나 국가의 높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진국이었던 나라는 선진국으로 올라서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이 됩니다. 이미 익숙해져 있는 기존의 시선을 교체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흔히 중진국의 함정에 빠져있다고 한다. 저자의 말처럼 후진국이 중진국까지 가는 길은 그냥 따라만 하면 어느 정도 된다. 우리는 지금껏 누구보다도 열심히 따라했다. 그런데 아직 우리는 선진국이 되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성장했고 OECD가입국이지만 우리 스스로를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인가 새로 만들면서 이루는 일정한 범위를 ‘장르’라고 합니다. 선진국은 바로 이 ‘장르’를 만듭니다. 장르를 만드는 나라는 문화적 차원에서 움직이고, 장르를 만들지 못하는 수입하는 나라는 아직 문화적이지 않습니다. 장르를 만들면 그 장르가 새로운 산업이 되어서 경제적인 성취를 이루고, 경제적인 성취가 힘을 형성하여 앞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장르-선도력-선진은 이렇게 연결됩니다.
선진국은 바로 선도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장르
이다. 우리는 아직도 선진국이 만든 장르에서 열심히 행동할 뿐이다. 즉 전략적이지 못하고 전술적인것에만 능한 것이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우리도 장르를 만들 수 있는가?
결국 장르를 만드는 것은 바로 질문의 힘이다.
저자는 후진국이나 중진국에서의 공통점은 대답에 너무 공을 들인다는 것이다. 누가 더 많이 알고 누가 더 정확히 알고 있는지를 측정하는 것이 대답 중심적인 사회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문제를 내고 답을 선택하는 시스템에 더 많이 공을 들인다.
대답에서는 지식이나 이론의 ‘원래 모습’을 그대로 뱉어내는지의 여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원래 모습’은 현재나 미래가 아니라 과거입니다. 그래서 대답이 팽배한 사회에서는 주로 과거를 따지는 일에 더 몰두합니다.
그래서 질문보다 대답을 위주로 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논의가 주로 과거의 문제에 집중하게 되어 버리거나 진위 논쟁으로 빠져버립니다.
지식의 원래 형성된 모습에만 목매고 있는 것이다. 누가 더 책을 더 정확히 많이 읽고 답을 할 수 있는가에 모든 시스템에 맞추어져 있다. 대답 자체가 현재나 미래를 심사숙고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에 했던 답들.. 많은 권위자들이 만든 답들.. 많은 시간이 지닌 답들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싶다. 즉 질문을 할줄 모르니 장르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대답은 우리를 과거에 갇히게 하고 질문을 우리를 미래로 열리게 합니다. 대답은 인격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지만, 질문은 궁금증과 호기심이라는 내면의 인격적 활동성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일이다. 한마디로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인격’입니다.
그렇다. 인격적인 준비없이 대답은 늘 가능하다. 소위 말하는 엘리트가 더 사회와 그 구성원들에게 악을 끼치고 있는 현실을 보면 맞는 말이다. 결국 우리는 질문하지 못한채 답만 하는 사회에서 살았던 것이다.
건국-산업화-민주화 다음의 단계는 바로 선진화이다.
우리는 건국, 산업화를 거쳐 수많은 피를 흘리고 민주화를 이루어냈다. 그렇지만 아직도 산업화와 민주화의 부딪힘속에서 살고 있다. 자신이 겪었던 세상, 그 세상이 가장 옳은 줄안다.
건국의 틀도, 산업화의 틀도, 민주화의 틀도 이제는 모두 낡았습니다. 각자 자기 틀에 갇혀서 자기가 낡고 병든 것을 모르기 때문에 서로 핏대를 세우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입니다. 자기 틀로만 세계를 볼 줄 알지, 유동적 세계 안에서 미래를 향한 목표를 설정하는 지성적인 능력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저자는 우리가 더 낳은 선진화의 길로 들어서라면 지금의 낡은 틀을 벗어나라고 충고한다. 지금 우리는 너무나도 갈등의 시간속에 살고 있다. 서로에 대한 반목과 의심이 거듭되고 있다. 그것이 아직 우리가 갈 길이 멀다는 현주소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바로 시선을 높히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다른 시선으로 현재와 미래를 봐야 할 때이다. 아직도 좌파냐 우파냐가 아니고 정말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선진화가 될 수 있는지에 숙고가 필요하지 않을까?
3. 꿈이 있는가?
어느 조직이든지 그 조직이 붕괴하기 전에는 공통의 조짐이 나타납니다. 바로 그 조직의 구성원들이 자신이 속한 조직에 대해서 비판하고 평가하는 등의 비평만 하는 일이 점점 일상화되는 것입니다. 바로 구성원들의 이탈 현상입니다. 구성원들이 참여자나 행위자로 혹은 책임자로 존재하지 않고 제3자처럼 존재합니다. 구성원들이 구경꾼으로 존재하기 시작합니다. 이렇듯 구성원들 가운데 점점 비평가와 분석가가 많아진다면 이는 매우 좋지 않은 조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일에서든지 일류 비평가들과 일류 분석가들이 넘쳐납니다. 제3자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지요. 꿈과 자신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책임성 있는 ‘나’로 존재하지 못하고 ‘우리’ 가운데 한 명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비평이나 분석에 빠지는 제3자적 태도로만 존재하는 삶은 주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데에는 취약하기 마련입니다.
무서운 말이다. 구성원들이 구경꾼으로 존재한다는 말이 무서운 말이다. 우리가 아닌 내가 되면서 그들과 나를 분리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 따라서 나는 죄가 없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일류 비평가나 일류 분석가보다는 이류라도 좋으니 1인칭 참여자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일반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 살다 가겠다는 의지로 뭉치 이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합니다. 바로 꿈을 꾸는 무모한 사람들 말이죠.
현란한 말보다는 행동이 중요한 것이다. 다만 엄격한 측정과 평가로 도전 정신을 무디게 해서는 안된다. 얼마나 많은 조직에서 측정과 평가로 도전을 갉아먹는가..그들은 늘 입버릇처럼 말하다. 도전하라고 하지만 그 말 안에는 실패하면 책임지라는 사슬도 포함시켜 버린다. 적어도 ‘이렇게 했더니 실패했다’라는 결과도 자산으로 분류할 수 있는 넉넉한 배짱이 필요하지 않을까? 늘 그렇듯이 행동가들은 분석가보다 더 많은 실패를 하지만 무언가를 진일보시킨 사람들은 언제나 행동가들이었다.
합리성에 집착하기보다는 꿈을 꾸십시오. 꿈은 언제나 이룰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미 있는 관점들로 명로하게 해석되어 합리적으로 보이거나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이미 꿈이 아닙니다. 착실한 계획일 뿐이지요. 꿈은 생래적으로 거칠고 비합리적이며 돌출적입니다.
4. 소감
너무 좋은 내용과 뛰어난 성찰이 많아서 나의 짧고 좁은 식견으로 감히 담아내기가 어려운 책이었다. 뻔한 좋은 내용보다는 생각을 많이 깨우치게 하는 책이다. 물론 이 한권으로 하루 아침에 모든게 달라지지 않겠지만 적어도 나 스스로가 얼마나 좁은 시야로 살아왔구나라는 반성은 느끼게 해준 책이었다. 그리고 과연 내 꿈은 무엇인가라는 부끄럽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책을 요약하기에는 꽤 어려웠다. 감히 내 소견으로는 요약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서없이 그 중 일부만 나열했다. 따라서 반드시 일독을 권한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일갈하는 메시지로 마무리 하겠다.
사회가 낡고 병들면 많은 사람들이 직업인으로 존재하지 않고 직장인으로 존재합니다.
이렇듯 직과 업이 분리된 사람들로 채워진 조직에서는 부패가 만연하고 생기가 없습니다. 직과 업이 분리된 사람들로 채워진 사회는 급격히 쇠퇴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맡은 ‘직(職)’을 ‘업(業)’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쉽게 돈 몇 푼에 영혼을 팔지 않습니다. 부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몰입할 수 있습니다.
창의적인 도전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