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자. 당신이 아우슈비츠에 갇힌 남자이다. 당신의 아내와 아이는 가스실에서 죽었다. 당신은 영원할 것 같은 그 인간성 말살의 장소에서 매일 매순간 최악의 고통을 겪으면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고 버터나갈 수 있을까?

이 책의 저자 빅터프랭클이 겪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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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할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인간을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이 사실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떠한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저자의 말처럼은 인간은 어떠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적응하는 사람도 있는 방면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도 책에선 나오고 있다. 그들의 차이는 다음 3가지에서 나온다.

2. 의연하게 운명을 받아드릴 수 있어야 한다.

[테헤란에서의 죽음]
돈많고 권력있는 페르시아 사람이 어느 날 하인과 함께 자기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 하인이 별안간 비명을 지르면서 방금 죽음의 신을 보았다고 했다. 죽음의 신이 자신을 데려가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하인은 주인에 말중에서 가장 빠른 말을 빌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말을 타고 오늘밤으로 갈 수 있는 테헤란으로 도망을 치겠다는 것이다. 주인은 승낙을 했다. 하인이 도망치자. 주인이 집안으로 들어가자. 죽음의 신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자 주인은 죽음의 신에게 물었다. “왜 저의 하인에게 겁을 주고 위협했습니까?” 그러자 죽음의 신이 대답했다. “위협하지 않았다. 다만, 오늘밤 그를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그가 아직 여기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을 뿐이다”

우리는 운명을 예측하여 미리 적절히 행동할 수가 없다. 선택에 대한 결과예측을 전혀 할수가 없는 경우에는 우리는 더더욱 초조해하고, 더더욱 두려워하고, 망설인다. 그러나 그러한 사항에서는 오히려 우리게 주어진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책에서는 말한다.

3.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이 죽음을 부른다.

수용소에 갇혔던 사람들중에 1944년 상탄절부터 1945년 새해까지의 일주일간의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했다고 한다. 의사말로는 이 기간동안의 사망률 증가원인이 가혹해진 노동환경, 식량사정의 악화, 기후의 변화, 새로운 전염병 때문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 대부분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희망이 사라지자. 용기를 잃고, 절망감이 그들을 덮치고, 이것이 그들의 저항력에 위험한 영향을 끼쳐, 그들 대부분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짐 콜린스의 좋은 기업에서 위대한 기업으로에서 소개된 스톡테일 패러독스와 일치한다. 베트남전에 포로로 잡힌 미군중에서 크리스마스전에는 나갈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정작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풀려나지 않자, 절망에 빠져 죽음에 이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나가게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즉, 결국에는 성공할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과 동시에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직시하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인생은 절대로 우리의 스케줄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4. ‘왜’ 살아야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사람이 일단 의미를 찾는데 성공하면, 그것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힘도 준다. 그렇다면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을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 포로수용소나 강제수용소 같은 극한 상황에서 가끔씩 일어나는 일을 생각해보자. 내가 어떤 미군에게 들은 말인데 이럴 경우 처음에는 ‘체념상태’라고 부르는 행동 패턴이 나타난다고 한다. 강제수용소에서 이런 체념상태가 아침 다섯시에 잠자리에 일어나는 것은 물론 밖으로 일하러 나가는 것도 거부하고, 대신 막사에 남아 똥과 오줌에 절은 짚더미 위에 누워있기를 고집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아무것도 그들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 경고나 협박도 소용없다. 그런 다음에 아주 전형적인 행동을 한다. 주머니 깊숙이 감추어두었던 담배를 꺼낸 다음 그것을 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그가 앞으로 48시간 안에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한다.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없어지고, 순간적인 쾌락의 추구가 뒤를 잇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는 영혼이 없는 좀비와 같이 그냥 어슬렁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일에 지치고 일에 싫증이 나는 순간, 우리는 그 일에 대한 의미를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의미없는 일은 없다. 다만, 각자의 가치관으로 의미를 찾는 방식에서 의미가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의미를 찾는 습관이 발생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일에도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그것이 우리를 행동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게 마련이다. 의미있는 일이 더 큰 의미있는 일을 보여주기 때문이 작고 하찮은 일이 큰 일을 끌어 올수가 있다. 결론은 일자체가 우리에게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인생은 결국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하나씩 수행해나가는 과정이다. 큰 시각에서는 보잘것없는 일일지라도 그것이 우리앞에 놓여져 있다면 그것을 해내야 한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편안한 세상에서 편안한 고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잠시 내려다 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