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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없는 미래라.. 과연 그런 미래가 올 것인가? 그리고 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니 그전에 과연 노동없는 미래가 가능하기나 한단 말인가?

우리같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없는 미래는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처음에 이 책을 골랐을 때는 앞으로 인공지능의 로봇의 세상이 열려서 인간이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장미빛 해석만 제시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책을 읽고나서 노동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흔히 앞으로의 미래에서 인공지능등 로봇의 세상이 오게 되면 대부분의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혹은 아니다 그로 인해 새로운 일자리가 파생될 것이다라는 의견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답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알고 싶은 게 단 하나, ‘언젠가 로봇이 내가 하는 일을 대신하게 될 것인가?’라는 것이라면, 내가 그 질문에 대신 답할 수 있다. 답은 ‘그렇다’이다. 로봇이나 다른 어떤 종류의 기술이 당신의 일을 대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그러한 변화속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봇이 내 일자리를 가져가는 게 좋은 일일까 아니면 나쁜 일일까?

이 말같지 않은 질문에 예상된 답변을 하기전에 먼저 우리의 삶에 새겨진 일에 대한 개념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우리는 일을 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하고 사회 구성원의 각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사회에서 인정을 받거나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책임감이 있고, 성실하게 가정적, 사회적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바람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일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운다는 것은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관념에 있어서 매우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일을 할 수 있는 남자나 여자가 일하길 거부하고 3일간 빈둥거리면 지낸다면, 그 남자나 여자는 뻘겋게 단 인두로 가슴에 V자 낙인을 찍히게 될 것이고, 또 게으름뱅이를 신고한 사람 밑에서 2년간 노예로 지내라는 판결을 받게 될 것이다”

영국 구민법 1552년 -

지금까지 우리는 일과 노동은 같은 동의어로 간주해왔다. 하지만 일과 노동은 구분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노동은 그저 생존하기 위한 활동이다. 삶을 지속하기 위한 반복적인 행동이 노동이다. 따라서 노동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노예상태와 다름없다. 반면 일은 인간의 활동이다. 일은 자연속에서 생물학적, 동물학적 필요성에 의해 행해지지 않는다. 일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활동이다.

우리가 노동에 더 많은 시간을 빼앗길수록 우리의 일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노예제도를 통해서 노동을 해결해왔다. 한나 아렌트는 노동을 ‘사적인 삶’, 일을 ‘공적인 삶’으로 구분했다.

공적인 삶은 특정 목적 아래 정치를 행할 수 있는 물리적이며 법적인 장소를 만들어내기 위한 노동이 아닌 일의 영역이었다.공적인 세계는 그 세계에서 쫓겨난 노예들에게나 적합한 노동에더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가 보장되는 영역이었고, 그래서 그 영역에 사는 것은 아테네 시민의 가장 큰 꿈이었다. 사적인 세계는 그런 공적인 세계를 만들지 못한 야만인들이나 여성들이 머무는 영역이었다. 사적인 상태는 곧 궁핍한 상태로 받아들여졌다.

일과 노동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구분에서 노동은 그저 인간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특정 개인의 삶을 초월해 인류 문명을 지탱하는 세계를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은 노동이 아닌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인류를 발전시킨 부분은 바로 이론 ‘공적인 삶’에 매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출현하기 시작할때부터이다. 수많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루 종일 농사를 지으면서 과연 위대한 철학, 사상, 그리고 과학적인 발견이 가능했을까?

즉, 그들은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회적 신분이나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일(공적인 삶)을 잘 해낼수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서는 노동과 일은 분리되어지지 못했다. 현대는 노예제도나 신분제도가 없기 때문에 누구든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동의 개념을 일에 개념과 합쳐서 살아가야한다.

노예제도에서는 이러한 노동을 강제하기 위해서 채찍이 필요했으나, 현대인들에게는 교육을 통해 일에 대한 직업윤리로 정신무장을 시켜서 노동과 일을 병행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게다가 자본주의의 약점은 늘 공급이 수요보다 많다는 점이다. 그말은 달리 말하면 사는 사람보다 만드는 사람이 더 많다는 의미이다. 만드는 사람이 많아지면 즉 힘의 균형이 한쪽에 쏠리게 마련이다. 그 힘의 균형은 철저히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에서 드러나게 마련이다.

노동자들은 자본가에게 상품처럼 제공할 수 있는 자신의 노동력에 대해 사적 재산권을 갖고 있으며, 그런 노동력을 자신이 원하는 누구에게든 ‘자유롭게’ 제공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는 ‘떠날 권리’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러니까 자신이 어떤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할 때 언제든 그곳을 떠나 다른 직장으로 가면 된다는 것이다. 누구도 그런 당신을 막을 수 없으며, 그래서 당신은 자유롭다는 것이다. 세상에 일자리가 많고 다 같은 가치를 갖고 있다면 이 논리는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일자리가 귀한 세상에서 이런 ‘자유’는 환상이다. 또 심지어 가장 좋은 여건에서도, 노동자들은 먹고살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것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결국 일자리가 부족해지고 생계에 위험에 노출된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는 평등해지지 않게 된다. 이러한 현실에서 노동자들은 노조등을 결성해서 힘의 균형을 어느정도 맞추려고 행동하는 것이 오늘날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또한 일부의 노동자들에게만 그 균형의 결과물이 돌아갈 뿐이다. 이러한 현재의 상태에서 노동은 생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힘든 노동은 직업윤리 혹은 천직이라는 용어로 단단히 무장되어야만 했다.

이 ‘천직’ 개념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그런 개념 덕에 어떤 종류의 일도, 그러니까 심지어 가장 천하고 쓸모없이 보이는 일까지도 존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을 천직으로 봄으로써, 우리는 일을 품위로 높여주는 행동으로 또 인간의 존엄성과 불가분의 관련을 맺는 행동으로 보게 되고, 그래서 일 자체의 대한 믿음을 갖게 된다. 사람들이 자기 일을 기계들이 대신하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을 나타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기계들이 자신을 일을 빼앗가는 것은 생계뿐만 아니라 사회의 쓸모있는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조차 빼앗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이러한 직업개념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기계는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게 되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인간이 하고 있는 모든 노동은 결국 기계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노동(사적인 삶)은 기계에다 넘기고 인간은 일(공적인 삶)에 매진하도록 일에 대한 개념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더 적어진 일자리를 위해서 우리는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 앞으로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경제구조나 사회구조를 잘못된 정책이나 교육에서 찾고 있지 않고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자신이 무슨 기업이라도 되는 듯, 자신을 위해 적극적인 투자를 하고 위험과 실패를 감수하고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약점을 숨겨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그러면서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을 개선하려는 정치적 관점 같은 가치를 잃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신자유주의 철학을 내면화한 사람들은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대신 정치적 해결책을 찾으려 하는 대신 그냥 모든 문제를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탓으로 돌리고 만다는 것이다.

“경쟁이 점점 내면화되면…. 스스로 기업적인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주로 자기 자신과 경쟁을 벌이게 된다. 그러면서 기업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은 사람들을 내치고, 또 자신과 같은 가치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게으르고 비효율적이며 나약한 사람으로 보려 한다”

이런 변화가 어떻게 우리의 관심을 집단적인 행동으로 개인적인 행동으로 바꿔놓는지를 생각해보라. 그 결과 우리는 일정 수준의 정치와 멀어지게 되며, 그러면서 일에 대한 우리의 자세에도 변화가 오게 된다.

책에서 말하는 것은 로봇이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닌 신자유주의 정치체계, 그로 인해 발생된 교육, 직업윤리관, 가치관등이 우리를 더 궁지로 몰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식은 3가지라고 압축한다.

  1. 평상시와 다름없는 접근방식 : 미래에 로봇이 일자리를 대체한다는 지나친 과장이고 미래에도 지금같은 비슷한 상황이 될것이다. 이러한 접근방식을 저자는 가장 위험하다고 단언한다.
  2. 미래로 돌아가는 접근방식 : 신자유적인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제거한다. 즉 안전고용과 풀타임 고용을 실현하려고 한다. 한마디로 모른 사람들의 완벽한 복지시스템이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측면이다.
  3. 탈 노동 접근방식 : 생산적인 일은 주로 기계나 로봇에게 맡기고 인간은 좀 더 고차원적인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인류가 발전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을 더 견디고 더 참아야 하는 의무가 아니고, 일이 인간다운 삶의 중심이라는 사고방식 자체를 재고햐야 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이렇다.

결국 미래에는 기계나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할 것이다. 현재의 대량생산체제가 과거보다 월등했듯이 미래에는 기계나 로봇, 인공지능으로 인해 더 많은 생산물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의 신자유주의 체계에서는 그 생산결과는 소수에 사람들에게 집중되고,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직업윤리관에 의해 자기발전에 실패한 사람들로 치부되고 그들의 실패가 너무나도 당연시게 된다는 점이다.

완독하고 나서 굉장힌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기계나 로봇의 세상이 오면 세상이 더 나이질거라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실업자가 될것이라고 생각 뿐이었는데 책을 읽고 나서 100년전에 인류보다 지금의 인류가 훨씬 더 많은 생산품이 있는데 아직 지구 한쪽에서는 여전히 굶주리는 사람이 발생하고 있는데 그것이 그들이 무지하고 게으르기 때문에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자체.. 물고기를 주지 말고 잡는 법이 맞다고 생각한 자체, 일 자체에 대한 생각.. 그러한 생각들을 올바르게 비틀게 해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