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인간이 지구에 나타난 이상 항상 불안하지 않았을까? 불안은 한마디로 심리적인 요인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지만 그 심리적 요인이 미치는 영향은 상당히 크다. 하지만 과거에 불안에 대한 생각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불안이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이다. 도대체 왜 지금의 우리는 불안해할까?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라는 책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기로 한다.

1. 우리는 왜 불안한가?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때 받는 그 느낌 이것이야말로 불안의 원천이다.

즉 지금의 나보다 내가 더 나은 위치 혹은 더 좋은 것을 가질 수 있는데 갖지 못했다는 생각들… 우리와 아주 가까운 동등한 위치의 사람들이 자신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고 있을때 뒤쳐지고 있다는 좌절감.. 이런 탐욕과 질투가 불안의 원천이라고 본다.

현대인에게 더 나은 지위와 조건의 생활들은 중요한 목표가 되어 버렸다. 얄긋게도 중세의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대부분이 사람들이 더 불안감을 느낀다.

과거에는 성공에 대한 기준이 혈연과 가문에 달려 있다. 즉 이미 태어나면서 정해진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로 넘어와서는 극복할 수 없는 가난이라는 것은 없다고 여겨진다. 과거에 농민의 아들은 농민이되어야 하고, 어부의 아들은 어부가 되어야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는 농민의 삶은 비참했지만, 누구도 농민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저자의 말대로 중세의 귀족과 사제들은 상위층에 있지만 결코 농민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동양도 마찬가지이다. 사농공상이라고 해서 농민을 두번째 중요한 사람으로 분류했다. 따라서 비록 과거의 농민은 비참하고 힘든 생활을 했지만 굴욕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불편은 모욕을 동반하지만 않으면 오랜 기간이라도 불평없이 견딜 수 있다. 병사나 탐험가들이 그런 예다. 그들은 사회의 극빈층이 겪는 것보다 더 심한 궁핍을 기꺼이 견디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버텨낸다.

하지만 현재에 와서는 달라진다. 이렇게 된 이유는 성공이라는 것이 결코 과거처럼 완벽한 세습화가 아니라는 것 때문이다. 물론 현대에도 부의 세습은 많은 영향을 끼치지만 적어도 그 틀을 깨서 일어난 사람들이 적지 않게 생겨났다.

이것은 저자의 말대로 이제는 지위가 낮고, 경제적으로 부족하는 것은 사회적, 태생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 능력 문제로 보는 시선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눈에 띄지도 않고, 퉁명스러운 대꾸를 듣고, 미묘한 개성은 짓밟히고, 정체성은 무시당한다.

바로 이러한 노골적인 시선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현대인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좀더 비싼 옷을 입고, 좋은 차를 모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퉁명스러운 대꾸를 하지도 못하고 받지도 않게 된 경험을 통해 이것을 사회적 관습으로 인식한다. 흔히들 백화점을 가도 좋은 옷을 입고가야 점원한테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처럼 말이다.

왜 그럴까?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

아쉽게도 더 좋은 옷과 더 비싼 차의 한계는 정해진바가 없다. 그런 것들에 휘둘려지게 되는 이유를 저자는 명확히 말한다. 바로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타인, 특히 속물들의 눈으로 자신을 보기 때문이라고…

속물의 독특한 특징은 단순한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똑같이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 속물들의 차별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더 나은 사람, 더 좋은 것을 가진 자가 더 나은 인간이라고 보는 것이다. 더 나은 인간을 보는 기준이 부와 명예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그에 걸맞는 사람들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와 명예가 없어도 세상을 훌륭하게 사는 사람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람 판단의 기준이 편협하기 때문이다. 외제차를 타고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이 시장에서 국밥을 파는 할머니보다 더 낫다는 기준이 어떠한 도덕적, 인격적인 잣대가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편협한 가치관때문이다. 실제로 그러한 시각으로 사회적/관습적으로 반복적해서 보게되므로 그런 사고에 갇힌 사람들은 자기보다 낮은 지위에 사람들에게 소위 말하는 갑질이라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속물의 시선, 그들의 시선을 대변하는 매체들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독립적 판단을 할 능력이 없는 데다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갈망한다. 따라서 언론의 분위기가 그들의 사고를 결정하는데 그 수준은 위험할 정도다.

기기막힐정도로 정확히 지금 우리를 보여준다. 결국 주체적인 삶은 사라지고 무엇보다도 그게 사라진것도 모르고 사는 것이다.

자신의 자리에 확신을 가지는 사람은 남들을 경시하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지 않는다. 오만 뒤에는 공포가 숨어 있다. 괴로운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만이 남에게 당신은 나를 상대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는 느낌을 심어주려고 기를 쓴다.

저자를 통해서 소위 말하는 갑질 을 부리는 사람의 심리를 알게되었다. 그들의 오만뒤에는 바로 공포가 숨어 있다는 것을….

2. 불안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때문에 느끼는 불안의 좋은 치유책은 세계라는 거대한 공간을 여행하는 것,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예술작품을 통하여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다.

뜨금없고, 비현실적인 해결책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불안한 것은 저자가 말한대로 속물들에게 지배되고 있고, 우리도 그렇게 속물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먼저 속물이 되지 말아야 하고, 속물들의 싸구려 시선에 상처받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거장의 작품과 문학과 철학속에서 자기 성찰력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여행을 통해서 거대한 자연과 인간의 만든 작품속에서 자신의 가진 편협함을 극복하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우리는 더 나은 물질을 소유한 자가 더 노력한 자이자 더 능력있는 자로 여긴다. 따라서 그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나은 인간이라고 판단한다. 누구도 이와 같은 노골적인 관습에서 자유롭기는 힘들다. 실제 누군가가 정당한 노력해서 성공을 하였다면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런 성공에 우쭐대지 말며 타인을 따뜻하게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역사, 문학, 철학, 예술, 여행에서 우리가 가진 기준이 얼마나 먼지같은 기준인지 알아야 하며, 자신이 이루어낸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겸손함을 배우면서 타인의 관점과 무자비한 사회적 관점에서 벗어나 자신의 올바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라는 것이다.

철학은 성공과 실패의 위계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 과정을 재구성할 뿐이다.

조금 더 인정받고자, 조금 더 얻고자 우리는 질시와 피곤한 경쟁속에 내몰려 있다. 직장내에서도 큰 목적은 잊은 채 작은 공에 매달려 상대보다 앞서고자 소탐대실하는 경우가 있다. 상대보다 내가 더 낫다는 우월감을 증명하느라 싸구려 경쟁에 목숨을 건다. 그렇게 큰 경쟁보다 작은 경쟁에서 이기려고 한다. 우리가 승자가 되려고 하지 않고 자신만이 승자가 되려고 한다. 그러다가 더 나은 대우를 받고자 우리의 양심과 자존심을 속물들에게 쉽게 넘긴다.

우리는 무엇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이 결정된다.

행복해지자! 적어도 행복이 무엇인지는 알고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