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병담(紙上兵談) : 종이위에 용병술

사마천의 사기에 염파인상여열전에 나오는 고사이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중국 전국시대에 조나라에는 조사라는 명장이 있었다. 이 조사에게는 똘똘한 아들인 조괄이 있었다. 조괄은 어려서부터 병서에 통달해서 아버지와 병법에 관해 토론하면 아버지마저 말문을 막히게 했다. 이 모습을 옆에서 본 조사의 아내는 흐뭇하면서 “조괄이 저리 총명하니 당신 대를 이어 명장이 될것같네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조사는 정색하면서

모르는 소리 마시오. 전쟁이라는 곳은 사람이 죽는 곳이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항상 발생하고 그때마다 순간순간의 상황판단과 결정이 생사와 승패를 좌우하는 곳이요. 조괄 저놈은 병서에 적힌 내용만 외우니 이는 지상병담일 뿐이요. 만약 조나라가 저놈에게 장군직을 준다면 패배는 틀림없을 것이요.

훗날 조나라는 진나라와 장평에서 국운을 건 전쟁을 벌이게 된다. 당시 진나라는 백전노장 왕흘보냈고 조나라 역시 백전노장 염파를 보냈다. 염파는 진나라의 군세가 강한 것을 알고 수성에 전념하게 된다. 원정을 온 진나라는 보급문제로 전쟁을 빨리 끝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도발을 해도 염파가 굳건히 버티니 진나라는 계략을 꾸며 “염파가 진을 공격하지 않은 이유는 진나라와 내통하기 때문이다. 진나라는 조나라의 염파는 두렵지 않은데 명장 조사의 아들 조괄이 나올까봐 걱정된다.” 라는 말을 뻐트리게 된다.

어리석은 조나라의 왕은 이말을 곧이 믿고 수비를 굳건히 한 염파에게 성과가 없다는 이유로 해임하고(단기 실적만 보는 리더의 좁은 눈이다) 그 자리에 조괄을 총사령관에 앉힌다. 이때 조괄의 어머니가 왕에게 간청한다.

저 애를 총사령관에 앉히면 안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죽은 남편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왕은 거절하고 임명을 강행한다. 진나라는 이에 발빠르게 진나라 최고의 명장 백기를 전선에 투입한다.

총사령관에서 부임한 조괄은 자신이 배운 이론대로 군대전체를 개편한다(변화는 현장상황을 이해하고 나서 이루어져야 한다. 성급한 변화는 혼란만 야기한다) 그리고 진나라의 백기를 공격하자 백기는 유인전술로 조괄의 군대를 포위하고 보급로를 차단한다. 이와중에 조괄은 전투중에 전사하고 지휘관을 잃은 조나라의 40만대군은 투항을 한다.

진나라는 너무 잔인하게 투항한 40만 병사를 모두 생매장시킨다(후에 장평에서 40만에 해당되는 인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책으로만 배운 지식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만드는지 보여준 역사속의 가르침이다. 지식은 표준적인 부분만 우리에게 가르친다. 하지만 삶은 역동적이다. 현장의 경험은 여러가지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그래서 임기응변이 필요하다. 책은 결코 임기응변을 가르치지 못한다. 그래서 경험이 필요한 것이다.

지식은 경험으로 필터링되어야 비로소 지혜가 된다.

현재에는 각 분야의 전문분야의 책들이 너무 많다. 물론 바로 경험을 쌓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충분히 책에서 이론과 원리를 접하면서 시작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책에서 배운 것이 마치 진리인양 떠받드는 것이다. 책속에 지식과 타인의 경험은 시행착오를 줄이는 좋은 과정이다. 결코 무시해서도 안되지만,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도 금기이다.

처음에 아무런 배경지식없이 시작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따라서 일단 공부하고 현장에서 부딛치면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습득한 지식을 경험이란 채에서 걸러지게 해야 한다. 이런 것이 소위 노하우이고 이러한 것들이 쌓이면 지혜라는 것이다.

좋은 조직은 이러한 시스템을 잘 갖추는 것이고, 좋은 인재는 이러한 경험을 중요시 하는 것이다. 물론 경험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자신의 포트폴리오에 맞는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 세프가 되고 싶은데 맨날 배달업무만 경험하면 더 발전은 없다. 물론 배달업무도 초기에는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지만, 그게 길어지면 곤란하다. 즉 자신의 포트폴리오에 맞는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조직이라는 곳이 내가 원하는 포트폴리오만을 쌓게 해주는 곳만은 아니다. 서로 이해관계가 잘 맞으면 되지만 어느 순간에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경험만 쌓아갈때가 있다. 이럴 때는 정말 고민해야 한다. 서로 윈윈하는 것은 좋지만, 내가 누군가의 포트폴리오만 빛내주는 존재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냉정하게 봐야 한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 같다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정말 자신이 가는 길에 맞는지 확인해야한다. 주변의 사탕발림과 허울좋은 격려와 칭찬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그건 진짜로 당신을 위한 말들이 아니다.

따라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있다. 그냥 편하게 눈감고 갈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눈을 감으면 언젠가는 그 댓가를 치를 날이 오게 된다. 상황을 잘 보아야 한다. 지금 상황에서 당신에게 주어진 상황과 앞으로 주어질 상황이 당신에 얼마나 좋은 경험이 될지 그 경험이 당신을 어디로 이끌지 잘보고 판단해야 한다. 그건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당신이 지나온 길이지 앞으로 당신이 가고 싶은 길을 보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당신이 가고 싶은 길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누구의 말도 듣지 마라. 단, 그 길은 당신이 잘할 수 있어야 한다.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하고 싶은 것과 잘할 수 있는 것은 분명 다르다. 당신이 가고 싶고, 잘할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당신이 가야할 길이다.

당신이 가야 할 길이 당신의 눈앞에 있거든 망설이지 말라.

당신이 가야 할 길이 분명하면, 기꺼이 확고한 의지로 그 길을 가라.

혹시 당신이 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멈추어 서서 가장 훌륭한 충고자들과 상의하라.

만일 당신이 가는 길에 어떤 장애물이 나타나면

정의가 가리키는 길을 따라 당신이 갈 수 있는 곳까지 조심히 나아가라.

<아우렐리우스>